한라산 등반, 거의 8시간동안 성판악으로 올라가 관음사로 내려오기-1월 9일

한라산 등반, 거의 8시간동안 성판악으로 올라가 관음사로 내려오기-1월 9일

Domestic trip/22:서귀포 위미에 있습니다

2022-02-06 04:00:43


매일 운동하고 쇠질 하는 동생 둘이 왔다. 애당초 목적이 한라산 등반을 정해놓고 온터라 이미 어느 정도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막상 정말로 내 등반 예약까지 다 하고 오니 심란하다.

대망의 D day

새벽 5시에 일어나 대충 고양이세수를 하고 올라가서 먹을 라면 물을 끓여 넣고 졸린 눈 비비며 차에 시동을 걸어 성판악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성판악 가는 길은 가로등도 없어 정말 앞이 하나도 안 보인다. 졸린데 앞은 하나도 안보이니 죽을 맛이다. 그렇게 30분 넘게 15년 된 자동차가 낑낑대며 겨우 올라갔는데 주차장이 이미 거의 만석이다. 성판악 주차장이 만석이 되면 10km를 더 달려 대학교 주차장에 세워야 하는데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한 놈이 제주 오자마자 하루 종일 눈이 없다고 징징댔는데 웬걸, 시작하자마자 아이젠을 끼고 시작해야 한다. 아이젠과 스틱은 필수인데 셋 중 하나는 아이젠이 없고 둘은 스틱이 없다. 이런 부족한 인간들.. 한라산까지 와서도 부족한 티를 낸다.

미리 예약한 표를 핸드폰으로 보여주고 장비 검사를 받은 뒤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려 있는 한라산에 다들 용기 있게 앞으로 나간다. 라이트가 없어도 다른 사람들 뒤에 잠시 붙어 가면 되지만 없으니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등산 갈 때 장비 보고 에베레스트 가냐고 놀렸는데 오늘은 장비가 없는 것이 후회된다. 역시 한국인은 장비빨이다.

https://youtu.be/8n42Mad2kcc

한 시간 정도를 걸으니 점점 밝아진다. 좀 더 걸으니 완전히 해가 뜨고 눈에 반사되는 빛 때문에 선글라스를 끼고 걸었다. 첫 번째 목적지인 진달래 대피소를 걸어가는데 인간적으로 너무 멀다. 5년 전에 올라갈 땐 금방 올라간 것 같은데 눈 때문인지 몸 때문인지 걸어도 걸어도 나오질 않는다. 그나마 지금은 급한 오르막이 아니라 편한 거라나. 혼이 빠진 것처럼 힘은 들어도 나무숲을 걸어가는 기분은 좋다.

12시까지 진달래 대피소에 도착하지 못하면 정상을 갈 수가 없는데 일찍 움직인 탓에 9시가 거의 다 되어 진달래 대피소에 도착했다. 그 얘기는 뭔가를 먹으면서 쉴 수 있는 곳에 도착했다는 것. 라면이 너무 먹고 싶었지만 라면은 정상에서 먹는 거라 해서 말도 못 꺼내고 초코바만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자전거처럼 호흡이 폭발하면서 올라가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진이 빠지는지 모르겠다.

코로나 시국인 지금, 실내에서 먹는데 인증도 없고 여러 명이 모여서 먹으니 좀 불안하다. 처음 입장할 때 전원 체크를 했으니 괜찮으려나.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실내 입장을 못하게 했다는데 지금은 날도 추운 데다 눈이 와서 앉을 곳이 없어 열은 것 같다. 장시간 걸어서 올라오다 보니 체온이 확 올라 잠바 지퍼를 열 정도다. 하지만 쉬니깐 확실히 체온이 훅 떨어진다. 와서 앉아보니 겨울에는 대피소 실내를 어떻게든 여는 게 맞는 것 같다.

신기하게도 대피소 이후부터 경사도 가팔라지고 풍경도 좀 더 삭막하게 바뀐다. 거기에 이제부터는 구름이 발아래에 위치한다. 대피소를 지나고 난 뒤 조금 긍정적인 부분이라면 눈앞에 한라산 정상을 두고 걸어가기 시작한다. 부정적인 부분은 그 산이 왜인지 가까이 오지를 않는다는 것. 무슨 마법이 걸렸는지 아니면 산에 발이 달린 건지 걸어도 걸어도 가까워 지질 않는다.

이제 정말 더 이상은 못 걷겠다 싶으니 정상에 도착한다. 두 번째로 보는 백록담은 호빵처럼 하얗다. 듬성듬성 보이는 돌들이 팥처럼 보이는 것 보니 배가 정말 고픈가 보다. 정상에 도착하면 '백록담'이라고 한문으로 휘갈겨진 비석과 한 컷 찍는 게 정석이지만 배는 너무 고프고 줄은 너무 길었다.

요리조리 눈을 굴리다 대충 앉을만한 곳에 가서 남의 등에 실려온 뜨끈한 물을 라면에 얼른 부었다. 구름 위에서 라면을 먹어서 맛있는지 힘들어서 맛있는지 모를 정도로 너무 맛있다.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라면 중에 제일 작은 것을 가져왔는데 또 오게 된다면 무조건 큰 라면으로 가져올 것이다. 아 그러면 물도 더 가져와야 해서 더 힘드려나.

정상에 도착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쓰레기 비닐봉지를 가져와서 먹은 것을 다 치우고 간다. 그래도 바닥에 작은 쓰레기들이 눈에 띌 정도로 많긴 하지만 산을 쓰레기장으로 만들던 시기는 지난 것 같아 다행이다. 올라오는 길에 쓰레기 하나씩 줍줍 하면서 왔더니 왠지 올해 복 받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산에서 더 기운을 받는 것 같다. 쓰레기 담을 큰 지퍼백 하나 가져와서 내 쓰레기랑 버려진 쓰레기 주워 보면 뭔가 운이 풀릴 것 같은 느낌이 드니 꼭 한 번 해보길 추천한다.

이제 쉴 만큼 쉬고 먹을 만큼 먹었으니 관음사 쪽으로 내려갔다. 관음사길은 설악산처럼 웅장한 느낌의 남벽의 산세를 볼 수 있는데 우린 내려가는 길이라 슬쩍슬쩍 보는 정도로 만족했다. 하산 초반에는 넘어질 것처럼 가파른 길이 나와 아이젠이 없이 온 사람들은 스키 타듯이 내려간다. 좀 더 빠르게 내려가는 느낌이라 금방 가겠구나 생각했는데 길이 좀처럼 끝나지를 않는다.

올라갈 때는 점점 힘들고 다리를 한 발 한 발 내딛기가 힘들었다면 내려올 땐 점점 쉬워지는데 도저히 끝이 나질 않아서 체력이 다 빠져서 이제 그만 걷고 싶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남는다. 비교를 해봤지만 둘 다 싫다...

드디어 도착. 새벽에 눈 뜬 뒤로 무려 10시간 만에 끝났다. 등산만 8시간 넘게 했다. 최근에 전현무가 다녀오는 걸 보면서 '쟤는 진짜 운동 좀 해야겠다'라고 했지만 내 몸뚱이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기진맥진이란 단어가 딱 어울리게 정말 힘들었다. 10년 만에 꺼낸 등산화도 힘을 다했는지 밑창이 뜯어졌다. 사람도 장비도 하나같이 상태가 메롱이라 누가 보면 한라산에서 살다온 줄 알 것 같다.

등반을 하고 나면 인증서를 출력할 수 있다. 별 의미 없는 것이지만 올라갔던 사람들에겐 돈이 얼마든 뽑아서 집에 가보처럼 장롱 한편에 고이고이 모셔 놓을 종이 한 장이다. 인증서를 받으니 뭔가 해냈다는 뿌듯함도 있지만 일단 씻고 좀 눕고 싶다.

 


#전현무랑동급체력 #등산할때쓰레기봉투챙기기 #다음엔관음사로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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