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타고 난 뒤의 일정은 고산족 마을까지 걸어가는 것이다. 우리 팀을 인솔해주는 아저씨가 앞장서고 줄줄이 걸어갔다. 대략 30분에서 1시간을 걷고 쉬기를 반복하면서 걷는데 걸으면서 서로 어디서 왔는지도 묻고 같이 여행 온 사람과의 관계가 어떤지도 물으면서 간다. 바르샤 아저씨랑 프렌치 아저씨는 조금 걷고나니 힘들어서 말이 점점 없어졌다. 이 팀에서 그나마 나랑 이야기 하던 사람들이 조용하니 나까지 조용히 걸어올라갔다.
사는 나라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성격인지는 몰라도 걸어가는 것도 각기 다 다르다. 일단 스위스에서 온 애들은 정말 끝까지 입을 안 쉬고 올라간다. 왁자지껄하게 떠들다가 노래까지 부르면서 올라가는데 저 동네는 어떻게 살길래 사람들이 저렇게 유쾌한지 꼭 가보고 싶었다.
독일 애들은 좀 조용하게 올라간다. 말을 해도 서로 거의 귓속말처럼 하고 (레즈비언 같기도 했음) 스위스 애들이 독어로 말하고 노래를 불러도 묵묵히 자기들만의 시간을 보낸다. 오스트리아 여자애는 이쁜 편이었는데 얜 영국 훈남께 뻑 가신 것 같다. 다른 이와는 거의 말하지 않고 오직 영국 훈남 옆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어디를 가나 잘생긴 애가 최고다.
우리 영국 훈남은 뭐랄까.. 좀..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것 같다. 왜 아무 말 없이 걱정꺼리 생각하면서 길 걷는 그런 부류말이다. 처음에는 오스트리아 여자애랑 대화를 좀 나누는가 싶더니 땅만 쳐다보고 걷는다. 별로 질문도 없고 먼 산 보는 때도 많고 뭐랄까 좀 걱정을 안고 온 여행객 같다.
부부들이 걷는 것도 확연히 달랐다. 두 커플 뿐이었지만 영국 맨체스터에서 온 부부는 남자가 짐을 좀 더 짊어졌을 뿐 둘 다 훅훅거리면서 자기 페이스를 유지한다. 러시아인 캐나다 커플의 경우 남편이 엄청 자상해서 위험한 곳은 손도 내밀어주고 좀만 더 가자고 달래주기도 하고 쉴 때 다리도 주물러 준다. 물론 짐은 전부 남편이 짊어지고 걸었다. 이게 민족성때문인지 그냥 성격차이인지는 몰라도 신사의 나라의 매너가 러시아한테 완전히 졌다.
걷고 걷고 또 걷고 그러나 지쳐서 쉬고선 또 걸었다. 안내하는 아저씨한테 물어보면 계속 "little!!"만 반복할 뿐이고 사람들도 점점 그 아저씨를 "Liar"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Mr.Liar가 무려 네 시간을 속여서 고산족 마을에 처음 도착해서 본 것은 오토바이와 트럭이었다... -_- 길이 있는데 왜 그 산 길을 걸어왔냐고 각자 나라의 언어로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이미 도착한 다른 팀들은 웃으면서 자기들도 그랬다고 웰컴이란다. 웰컴은 얼어죽을..
밤부 호텔이라고 소개한 대나무로 벽쳐서 만든 공간에서 한 컷. 논산 훈련소가 이거보단 좋았다.
평범해 보이지만 이 길을 당신이 본다면 입에서 욕이 자동으로 나오게 되는 마법의 길이다.
할게 없다보니 서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다들 축구가 유명한데라서 축구 얘기를 꺼냈더니 다들 모이기 시작했다. 내가 부러운 눈으로 경기당 가격은 얼마냐고 물었더니 맨체스터는 경기의 중요도에 따라 가격이 다르다고 답하고 바르샤 아저씨는 자기가 일하는 호텔에 차비(Xavi)랑 다니엘 알베즈가 자주 오는데 차비는 자기가 한 피자 먹고 나이트 클럽으로 직행한다고 묻지도 않은 것을 떠들었다.
그러던 중 스위스 애들이 내가 신기했던지 나한테 물어보기 시작했는데 역시나 주제는 북한이다.
"북한 가봤어?"
"북한 사람 만나봤어?"
"정말 넌 북한 못 가?"
아주 그 놈의 북한 이야기만 물어본다.
나도 모른다고... 내가 어찌알어 그걸...
귀여워서 한 장 찍으려는데 말 엄청 안듣는다
여기도 마을이라 애들이 있다. 이런 마을에 애들이 있으면 하는 한국인만의 행동양식. 펜이랑 종이 사다가 애들한테 주는 것이다. 한국 부부들이 밑에서 사온 펜을 나눠주고 있었는데 우리 팀 애들이 쟤네는 왜 펜을 주냐고 물었다.
행복의 척도가 돈인 나라이다보니 여기서 사는 애들은 불쌍함의 극치인 것이다.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럴거면 좀 거금을 주지 꼴랑 펜이 뭐란 말인가. 내가 부모라면 굉장히 싫을 것 같다.
우리 현실에 맞춰 당신 자식이 어디갔는데 누가 불쌍히 여겨서 준 뽀로로 받아오면 기분이 날아갈까? 차라리 위의 사진처럼 그냥 벽 없이 놀고 깔깔대는게 난 더 좋아보였다.
여기도 나름 호텔이라고 편의시설이 있다. 유일한 놀거리는 맥주랑 음료수인데 전부 사먹어야 했다. 특이한건 선결제가 아니라 후결제이다. 종이에 이름 적고 작대기를 그으면서 몇 개 마셨는지 기록했다가 내일 계산한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누가 많이 마셨는지 알 수 있었는데 분명 술을 잘 못한다던 러시아 남편이 저녁을 먹을 때 쯤 10캔을 찍었다. 맥주가 있었던 것도 신기한데 하루만에 10캔을 마신 인간이 있다는 건 더 신기했다. 역시 술은 러시아 애들이 최고다.
드디어 저녁시간! 밥은 힘들어서 그런지 맛있어서 다들 게걸스레 먹었다. 밥을 다 먹고 나니 운치있게 기타도 튕기면서 노래도 한 시간 불렀다. 노래소리에 주위 숙소에서 쉬던 사람들이 와서 구경했는데 한국에서 온 모녀와 세계여행 중인 부산 출신 대학생 두 명도 방 안으로 들어와서 같이 이야기를 하게됐다. 가뜩이나 말도 못하고 죽을 것 같았는데 정말 오아시스를 만난 것 마냥 기뻤다. 음.. 단지 아주머니가 딸이 시집 안가는 걱정을 나한테 한 시간 정도 풀어놓으셔서 조금 당황했지만... 여튼..
밥도 다 먹고 놀 것도 다 놀고 이제 잘 때가 되었는데 이 동네 청년들이 어두운 방에서 뭔가 피워댄다. 그냥 봐도 마리화나다. 촌이라서 아직 마리화나를 키우는 곳이 있나보다. 마리화나 안하는 좀 공부 좀 한 듯한 남자애가 이 동네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다. (물론 그냥 해준게 아니라 스위스 여자애들이 붙잡아 놓고 질문공세를 펼침)
이 동네에 길이 생긴 이유가 왕이 방문을 해서 길이 생겼다고 한다. 왕이니깐 걸어오지는 못할거고 차가 다녀야 하니 길을 놓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 길을 내기 위해 왕이 고산족 마을을 자주 찾는다고 한다. 자기 마을을 방문해주셔서 너무나도 감사하다고 하는데 정말 진심이 느껴졌다.
태국의 빈부격차는 세계 5위 안에 들어간다. 부의 분배도 문제지만 상류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되지 않기 때문인데 우리나라가 보고선 경계 할만한 나라이다. 국왕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오지까지 일부러 왔다가 가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가난은 왕도 어쩔 수 없다는 우리나라 속담도 생각이 나게 된다. 참.. 기분 좋게 놀러와서 술도 많이 먹고 알딸딸하게 취했는데 자기 나라에 대한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는 애 때문에 기분이 찝찝해졌다. 찝찝해서 잠이 안올 줄 알았지만 찝찝함은 찝찝함일뿐... 피곤해서 완전 골아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