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떠보니 내가 꿈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여전히 현실로 남아있다. 열차 안은 여전히 빡빡머리 군바리들로 가득 차 있고 나는 몸도 일으킬 수 없는 2층 침대에 누워 있으며 형 옆에는 백 세는 되어 보이는 할머니께서 새근새근 주무시고 계시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제일 비싼 2인실, 그다음 4인실, 그리고 가장 저렴한 오픈된 6인실이 있다. 우리는 당연히 저렴한 가격을 찾아다녔기 때문에 6인이 한 셋트인 자리에 조금이라도 편하게 지내보고자 1,2층을 예약했다. 우리와 함께 이 6인실을 나눠 쓰는 사람은 우리 맞은편 1층에 백 세로 예상되는 거구의 할머님과 2층에는 도저히 일어날 줄을 모르는 군바리 훗날 그는 우리에게 Sleeping Master란 칭호를 얻게 된다 반대 창가에는 딱히 자리가 정해지지 않은채 여러 군인들이 계속 바꿔가며 눕다 앉다를 반복하고 있다.
고개를 빼꼬미 내밀어 열차 전체를 보니 그냥 군인 투성이다. 군대 안가려고 석사 밟고 방산 회사에 들어갔는데 또 이렇게 꼬여서 군 생활을 체험하나 보다. 승준이형은 이 상황에 아이러니하게도 죄와 벌을 읽고 있다. 형... 도스토예프스키가 우린 무슨 벌 받고 있는거래?
2층 군바리도 계속 자고 1층의 바부슈카(할머니)께서도 계속 주무신다
기차 칸마다 붙어 있는 각 역 출도착 시간표다. 다음 역에서 몇 분 쉬는지 파악하기 좋으므로 사진을 찍어서 숙지하는 것이 좋다.
대충 해가 뜨고 오전이라 느껴지는 시간이 되니 군인들이 밥을 챙겨먹기 시작한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면 가장 힘든 것이 시간 개념이다. 비행기처럼 빠르게 타임존을 뚫고 가면 모를까 매우 애매한 속도로 타임존을 지나가기 때문에 시차가 아주 조금씩 흐트러진다. 하지만 이런 시차도 군인들과 함께 가니 밥시간 하나는 제 때 챙겨서 그것 하나는 참 편하다. 우리도 아침으로 라면에다 타기 전에 산 빵을 같이 먹었다. 본격적인 거지 생활 시작. 이 생활이라해도 와이파이와 무제한으로 제공되는 전력만 있다면 천국일텐데 아쉽게도 와이파이는 커녕 가져온 멀티탭도 못쓰게 한다. 도대체 멀티탭 쓰면 박수 받는다고 한 블로그는 다 뭐였을까. 난 쓰려고 꺼내자마자 승무원한테 제지 당했다. 역시 사람은 글로 세상을 배우면 안된다.
형! 정신을 놓으면 안되요!! 아니다. 그냥 정신놓고 자요
밥먹고 본격적으로 멍 때릴 준비를 하는데 영어를 정말 쪼금 하는 애가 와서는 어디서 왔는지 어디 가는지 묻는다. 드디어 형 말고 말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생겨서 눈이 반짝였다. 이 기차칸에 있는 애들의 보스라고 자기를 소개하는데 왠지 애들이랑 싸움 날까봐 먼저 성향 파악하고 문제 생기면 자기를 찾아 달라고 말하고 싶은 눈치다. 하지만 기껏 말한건 우리는 모스크바에 나무베러 간다는게 다였다 우리는 좀 더 말을 이어가고 싶었지만 영어가 짧아 미안하다고 하더니 휙 사라져 버린다. 그렇게 우리 둘은 또 다시 키릴 문자 감옥에 갇혀 멍하니 열차에 존재만 하게되었다. 러시아어 회화 사전이라도 다운로드 받아올걸...
우리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얼 러시안 입영 열차에 한국인 두 명을 추가로 태우고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잘도 달리고 계신다.
얘네가 밥 시간만 제 때 챙기는게 아니다. 애네들이 담배를 들고 나가면 그 역은 오래 쉬는 곳이다.
그래 친구라면, 빵에 라면이지.
실제 기차를 타보면 알겠지만 먹고 자는게 여기서 보내는 시간의 80% 이상이다. 요즘 유행하는 복잡한 것을 버리고 단순하게 사는 삶을 살아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이 기차 한 번 타는 것을 추천한다. 그 쪽 수행방법으로서 정말 이보다 좋은게 없다.
수 차례 먹고 자는 것을 반복하다 문득 밖을 보니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5월에 눈보라라니. 내가 따뜻한 열차에만 있다보니 여기가 시베리아 한복판이라는 것을 잠깐 깜박하고 있었다. 마을도 안보이고 저 멀리까지 하얀 땅과 나무만 보이는 시베리아. 티비에서 봤을 때는 정말 매력적인 모습이었는데 여기서보니 시베리아는 정말 감옥같이 삭막하다. 왜 러시아에서 정치사범들을 숙청하기 위해 죽이지 않고 시베리아로 보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이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하철도 999보다도 더 우울한 기차는 시베리아 추위따위 간단하게 뚫고 나가고 있다.
라면 2회 시식 후, 승준이형은 절면을 선언했다
시베리아는 밖을 봐도 눈과 침엽수 말고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5월에도 눈이 내리는 저 마을에 눈이 없는 날이 있긴 할까?
시베리아는 춥다. 그거 하나는 확실히 알았다
하루동안 본 러시아 육군들의 생활을 보니 우리가 한국에서 자주봤던 약에 취한 것 같은 미군과는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다. 얼굴 때문인지 몰라도 유머는 거의 없고 대부분이 창밖을 보면서 사색에 잠겨 있거나, 지겹게 하루 종일 카드게임을 하던가, 모여서 차 마시며 조용히 수다 떨던가, 어떻게든 핸드폰을 써보려고 노력하던가, 하루종일 죽은 것처럼 자는 것이 이들이 하는 일의 전부다.
특이하면서 아쉬웠던 것은 군대 규율 때문인지 몰라도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나눠줘도 전혀 먹지 않는다. 미군이면 벌써 장난치고 술 달라고 그러면서 헛소리랑 구라로 사람 짜증나게 했을텐데 얘네는 하루종일 차 마시며 서로 수다 떨다가 우리한테 오히려 먹어보라고 과자를 권한다. 정신교육을 받아서인지 몰라도 주위에 같이 탄 사람들을 절대 피곤하게 하지 않는다. 그러다 오래 쉬는 역에 정차하면 우루루 나가서 담배피고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사진찍고 들어온다. 순수한건지 말을 잘 듣는건지 몰라도 확실히 러시아 군인만의 독특한 침착하고 조용하면서도 순수한 분위기가 있다. 참고로 여기 있는 애들 대부분이 바이칼 호수 근처가 고향인 시골 애들이다
정말 애들 참 착하다. 규율이라고 술도 입에 안대고 지겹다고 짜증내거나 싸우거나 갈구지 않는다.
낮에 하루 종일 잤는데 밤 됐으니 또 자야겠다. 이 글을 쓰는 지금 기차는 전체 일정의 20%를 막 지나치고 있다. 오늘 포스트의 주제가 왔다갔다 하는 것은 읽는 사람의 느낌일 뿐이다. 절대 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게 아니란 소리다. 나는 정신이 멀쩡하다. 단지 이상하게 키릴 문자가 알파벳처럼 읽히기 시작하고 가끔씩 한국어나 영어가 들리는 것 같은 것만 빼면 나는 정상이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 라면 먹는 팁
중간에 라면 사진이 나왔으니 라면 이야기를 해보자. 한국에서 먹는 라면은 펄펄 끓는 물을 적당량 부어 4분 후에 먹는다. 이게 정석이다. 하지만 러시아의 물은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렇게까지 뜨겁지 않다. 그래서 면이 두꺼운 '농심, 삼양'등의 라면 회사 제품들은 제대로 익지가 않는다. 짐을 줄이기 위해 봉지라면을 가지고 가서 '뽀글이'를 해먹겠다면 말리고 싶다. 차라리 그냥 생라면을 먹는 편이 낫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 라면은? 바로 러시아에서 라면으로 엄청나게 성공한 팔도의 '도시락'이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는 도시락 라면에 물을 원래 물 붓는 선보다 5mm정도 더 넣고 4분이 아니라 5분 내지는 6분 정도 (불려 먹는다는 느낌으로) 기다린 후에 먹는 것이 가장 한국에서 먹던 맛과 비슷하다.
열차에 군인이 탔을 경우
열차를 탔을 때 군인이 있다면 술은 열차 안에서 먹지 않으면 좋을 것 같다. 20대 초반의 남자애들이 금주를 하고 있으니 얼마나 마시고 싶겠는가. 하지만 마시면 엄청난 벌을 받기 때문에 참는 것이다. 그걸 옆에서 괜히 건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경비 (1인당)
- 빠다코코넛같은 과자 60R
- 도시락 라면 65R
총 경비 125R
여행 총 경비 525,936원 + 12,081R + $5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