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이 카드가 러시아 출입국 카드다.
오늘은 같이 지내는 여행 파트너의 교체가 있는 날이다. 그간 함께 고생했던 승준이형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먼저 이동하고 내 여자친구가 휴가를 내서 모스크바로 들어온다. 형이 오전에 공항으로 가고 여자친구가 밤에 들어오기 때문에 중간 빈 시간을 이용해서 기차에서 잃어버린 러시아 출입증 카드를 재발급 받기로 마음 먹었다. 러시아는 특별히 세관신고서나 한국의 경우 비자가 필요없지만 입국하는 모든 사람들은 러시아 출입증 카드라 불리는 조그마한 종이를 받는다. 호텔에 투숙할 때 이 종이가 항상 필요한데 기차에서 여권 검사를 할 때 빠졌는지 가져가고 안돌려줬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때 분실하여 호텔 열쇠를 못받는 상황이다. (다녀보니 호스텔은 해준다. 비싼 호텔일 수록 이런 것을 잘 지킨다)
비싼 티내냐?
우선 호텔 직원에게 '출입증 카드를 어디서 받으면 되냐?'를 영어로 한 번 물어보고 바디랭귀지로 한 번 설명하니 메모지에 주소 하나를 적더니 다녀오란다. 그런데 정확한 주소가 아니라 일종의 구역이 나와서 정확히 어디냐고 물어보니 자기도 모른단다.
야 이 xx 어쩌라고
결국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친구 티무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그 지도에 위치한 경찰서를 찾아서 정확한 지도를 보내줬다. 왕복 1시간 걸리는 거리다.
30분 경과, 지하철 두 개 타고 내린 뒤 걸어가서 근방에 도착했지만 도대체 어떤 건물인지 알 수가 없다. 러시아의 관공서는 한국이나 기타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처럼 "나는 관공서다!!!!"라고 확실하게 다르게 생긴 것도 아니고 아파트던 마트던 관공서던 전부 다 비슷비슷하게 생긴데다 간판도 크게 하지 않아 초행길인 사람으로서는 너무 어려운 길이다. 게다가 근처에 가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주소와 지도를 보여주면서 길을 물어보면 알려주는 사람마다 방향이 다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도대체 내가 들고 있는게 제대로 된 주소와 지도인지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1시간 30분 경과, 겨우 경찰서를 찾았다. 이 동네에 있는 건물은 다 돌아본 것 같다. 경찰서에 들어서니 입구부터 철문에 라이플로 무장한 경찰관이 있고 당연히 그는 영어를 못한다. '넌 뭔데 여기 왔냐?'는 눈빛으로 고개를 까딱까딱이길래 여권을 보여주면서 "lost immigration card"라고 말했고 당황하는 표정을 하더니 안으로 들여보내 준다. 경찰서 안에 들어가서도 난 계속 "lost immigraion card"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말하고 러시아에서 흔히보던 '자기들끼리 회의하기'가 시작됐다. 몇몇 경찰들이 주문같은 러시아어로 서로 말하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영어 할 줄 아는 사람을 찾는다. 15분 정도 지났을까, 영어 할 줄 아는 사람이 오더니 여기는 관할구역이 아니기 때문에 호텔로 돌아가서 호텔 쪽 관할 경찰서로 가야한다고 한다. 그리고 새로운 주소가 내 손에 쥐어졌다.
2시간 30분 경과, 다시 호텔 근처로 돌아와 경찰이 알려준 곳으로 갔더니 왠 경비가 또 '넌 뭔데 여기 왔냐?'는 눈빛으로 한 번 보고 러시아말로 뭐라뭐라 하더니 문을 닫고 잠가 버린다. 보아하니 전혀 도와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모두 포기하고 호텔로 돌아갔다. 황당한 얼굴을 한 채 다시 호텔로 돌아온 뒤 매니저를 다시 부르고 그 동안의 고생길을 하나하나 알려줬다. 그리고 "너가 잘못 알려줬으니 이제 난 모르겠다."라고 배 째버리고 소파에 앉아 버렸다. 매니저가 자기도 처음 겪는 일이라며 잠시만 앉아 있으라고 하더니 또 바쁘게 어딘가로 전화를 하기 시작한다. 오늘 안에 이 일이 끝날지 모르겠다.
아몰랑, 배 째
3시간 경과, 이번에는 사복경찰이 아예 호텔로 왔다. 와서 어떤 서류를 내밀더니 쓰라고 한다.
뭔지 알아야 쓰지
호텔 매니저가 통역해 주길 경찰이 러시아어로 말하면 자기가 영어로 통역을 해줄테니 그걸 다시 한글로 적으라고 한다. 이렇게 언어가 약한 세 명이서 눈치게임하듯 분실 사유서 쓰기 게임이 시작됐다. 영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봐서는 대충 '누가 훔쳐간 것이 아니고 내가 부주의하게 잃어버린 것이다'란 내용인 것 같은데 어짜피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내가 여기에 욕을 쓰던 칭찬을 쓰던 아무도 못알아볼 것이기 때문에 없는 말 있는 말 지어내서 사유서를 써서 줬다. 대충 내용은 '나는 기차에서 분실하였으며 누가 훔쳐가지 않았고 강도를 당하지도 않았으며 내가 잃어버렸기 때문에 재발급을 원한다'란 내용으로 썼다. 참고로 이렇게 쓰는게 맞는지 난 모른다. 그저 들리는대로 썼다.
3시간 30분 경과, 호텔로 온 경찰이 혼자 열심히 서류를 쓰더니 자기가 할 일은 다 했으니 자기랑 같이 경찰차 타고 경찰서에 가서 서류를 하나 받아 이민국으로 가면 끝난다고 한다. 그러면서 미리 이민국 주소를 적어주는데 아까 매니저가 준 주소와 전혀 다르다. 왜 주소가 다르냐고 물어보니 이민국과 경찰서는 따로 있단다. 매니저 이 인간...
사복 경찰답게 차도 일반 차량인 러시아 경찰차를 타고 경찰서로 도착했다.
경찰이건 뭐건 여기는 골목에서 100km는 가뿐하게 밟는다
처음 방문했던 경찰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경찰서로 안에 감옥처럼 생긴 구치소와 영화에서나 보던 진술하는 방도 있다. 크기는 이 경찰서가 더 작아보이는데 풍기는 분위기는 더 까다로운
강력범죄?
일들을 맡아서 처리하는 곳 같다. 이런 곳에 나와 함께 온 경찰은 5분 기다리면 자기 매니저가 서류를 줄 것이라며 날 혼자 두고 휙 사라져 버린다. (물론 이 모든 의사소통은 'Five minute, he', '뭔가 주는 동작'으로 처리)
러시아 구치소를 보니 한국처럼 오픈되어 쇠창살만 있는 곳이 아니고 감옥처럼 철문이 있고 심지어 불도 전부 끈 채 입구 앞에 정말 작은 전등 하나만 킨다. 오줌싸러 화장실 가는 시간인지 경찰 한 명이 잠긴 문을 풀고 안에 있는 죄수를 화장실로 보낸다. 화장실로 보내면서도 경찰은 계속 감금되었던 사람한테 뭐라뭐라 하면서 (대충 쳐다보지 말고 화장실이나 가! 인 것 같았다)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나와 주위에 있던 중국인들 모두 조용히 눈을 아래로 깔거나 천장을 보면서 최대한 그 사람이랑 눈을 안마주치려고 노렸했다. 화장실 간 사이 잠깐 구치소 안을 보니깐 정말 아무것도 없는 독방이다. 게다가 불도 없어서 저 안에 있으면 잠은 정말 잘오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구치소면 경범죄나 동네서 술먹고 싸운 사람들정도를 넣는 곳일텐데 독방이고 경찰이 진짜 막 대한다. 내가 출입증 카드 때문에 경찰서를 간다고 했을 때 모든 러시아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걱정을 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중국인 세 명도 나와 함께 기다리고 있다. 나랑 다르게 이 사람들은 한 명씩 진술하는 방에 들어가서 경찰과 말하고 온다. 간간히 크게 다그치는듯한 경찰의 고함과 함께.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확실히 피해자는 아닌 것 같다. 이 사람들을 지켜보다 알게된 점인데 러시아 사람들 정확히는 경찰들이 영어는 못해도 중국어를 하는 사람들은 있다는 것이다. 거의 단어 나열하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중국어로 의사소통을 한다는게 정말 신기했다. 도대체 영어는 왜 못하는 것일까? 같은 사회주의여서 배울 수 있었고 영어는 교육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인가? (아 물론 10대 20대의 사람들은 영어를 잘한다)
지하철만 오늘 몇 번을 탄거지
4시간 경과, 지금 나의 귀중한 서류를 쓰고 있는 아저씨는 독수리 타법이다. 그것도 한 손. 워드 타이핑 장인인지 키보드를 하나하나 조심조심 버튼을 누른다. 곧 있으면 여자친구 비행기가 오는데 이 아저씨 느려도 너무 느리다. 그리고 그냥 보이는대로 타이핑만 하면 될 것을 갑자기 뭐가 맘에 안들었는지 지운다!! 왠지 러시아어 자판 모르는 내가 써도 이 컴맹보다는 빨리 쓸 것 같다. 더 짜증나는 것은 직급도 높아 보이는 아저씨가 중간중간 잡일도 대단하다. 경찰 사무실 문 열어주기(철문으로 철저히 보호되어 있다), 쉬러 들어오는 경찰들이랑 잡담하기, 짜증내며 전화받기, 담배 없다는 애들한테 담배 빌려 주기, 방금 그 애 한테 라이터 빌려 주기, 이 놈 저 놈 총들고 있는 애들의 질문에 답하기, 멍하니 하늘보기, 뒤이어 땅보기. 정말 집중해서 키보드 보고 타이핑 하기 빼고는 다 하는 것 같다.
4시간 30분 경과, 드디어 서류 작업이 끝났다. 서류 장인이 만든 고귀한 프린트물을 받고
꼴랑 다섯 줄 썼다
이민국으로 뛰어갔다. 역시나 이번에도 알려준 주소를 사람들이 모른다. 내 운이 여기서 끝나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찰나, 구세주처럼 영어를 하고 심지어 지도 맵도 쓸 줄 아는 아랍계 청년이 정확한 주소와 가는 길을 알려줬다. 정말 그 잘생긴 애 덕분에 아파트와 함께있는 이민국에 도착. (이민국과 아파트가 같이 있어서 도움 없으면 절대 못찾는다)
아파트 1층에 숫자가 붙어있는 곳이 이민국이다. 아니 이민국은 외국인을 위한 곳 아니었나? 이렇게 못알아먹게 만들면 누가 찾아오나 싶다. 급해서 일단 아무 집이나 문 열고 들어가서는 서류를 보여줬더니 2번 집으로 가란다.(너무 급해 사진을 못찍었는데 겉에서 봐서는 절대 관공서인지 모른다.) 2번집으로 가서 서류를 보여줬더니 또 러시아어다. 이민국이면 영어해야하는거 아닌가? 아!!, 여기는 러시아다. 러시아에 왔는데 러시아어를 못하면 내 잘못이다. 영어 만능 주의인 세상에 산, 영어 쓰면 유식하다고 생각하던, 영어는 당연히 다 통할 것이라고 생각한, 영어가 안통하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나에게 정말 일침을 가하는 곳 러시아다. 세상은 넓고 각기 다르게 살아가는 방식의 차이에 대해 깊은 깨우침을 받은 나 따위는 접어주고 자기들끼리 나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을 하기 시작한다.
5시간 경과 내가 서류를 다시 받기로 한 뒤, 가장 일처리를 빠르게 하는 사람들이 내 눈 앞에 있다. 물론 나한테 어떤 서류 작성을 시키려고 러시아어로 설명을 하다가 포기하고 전부 자기들이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래 그게 젤 빠른 방법이야!!!
그러더니 왼손, 오른손 손가락 전부와 손바닥까지 지문을 모두 찍고 출입국 카드를 받았다.
드디어 받았다!!!
참 신기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들 당황하고 '이 일을 어떻게 해야하나'하는 표정으로 난감해 해도 한 명
호텔 근처 경비
빼고는 누구도 도망가거나, 포기하거나, 나한테 위임시키거나, 다른 사람한테 넘기거나, 잃어버린 내 잘못이라거나, 처리해 줄테니 돈을 달라고 하지 않는다. 내가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 위압적으로 행동하거나 돈을 요구하는 것이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다만, 안 웃고, 주소 이상한데로 알려주고, 서류 작성이 느리고, 모든 것은 러시아어로 이야기 해주고, 못알아 듣는 것을 아는 순간 영어로 말하려다 포기하고, '나는 다 했으니 이제 쟤한테 가 봐' 하는 횟수가 좀 많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이 처리는 되게 해준다.
러시아의 관공서와 경찰서를 구경하고 이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알고 싶으면 출입국 카드를 잃어버리는 것을 추천한다. 다만, 몇 일이나 여행할지는 모르겠지만 1-2일은 그냥 쌩으로 날린다고 생각하는게 좋다. 그리고 러시아 친구들이 걱정했듯이 "러시아 관공서에 가면 좋은 일이 별로 없다"란 케이스에 걸리면 나도 모른다.
늦었다. 공항 가야지.
관공서 팁
- 이민국은 오후 8시까지 한다.
- 문서를 잃어버렸을 때 처리 순서는 다음과 같다. 다만, 러시아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하는 사람이 없다면 매우 힘들다.
- 경찰에게 자필 사유서를 전달한다.
- 경찰이 접수하고 관련 내용을 문서로 뽑아준다.
- 그 문서를 들고 이민국으로 가서 지문 찍고 재발급 받는다.
- 시간이 오래 걸리니 절대 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 출입국 카드가 없으면 러시아에서 출국 시 크게 문제 될 수 있다고 한다. 이유는 모른다.
- 내가 만난 모든 러시아 사람들은 (호텔 근처 경찰과 워드 장인 빼고) 짜증내지 않고 이야기하면 최대한 빠르게 도와주려고 노력한다. 이미지와 다르게 '그 들만의 방식으로' 친절하다.
- 이보다 더 큰 문제이거나 전혀 진척이 없다면 반드시 '대한민국 대사관'이란 단어를 떠올리자. 대체로 별로라고 하지만 그래도 큰 힘은 맞다.
경비
- 도모데도보행 아에로 익스프레스 왕복 + 여자친구 표 470R * 3 = 1410R
- 저녁 1062R
총 경비 2472R
여행 총 경비 525,936원 + 24,032RUB + $5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