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아프리카 음악, 젬베의 세계를 알려준 올렉이 오늘은 '루프탑 투어?'란 것을 저녁에 하자고 제안했다. 뭔가 단어만 듣고 알듯말듯해서 그게 뭐냐고 물어봤더니
"집 위에 올라가서 도시 구경하는거야"
라고 대충 설명하는데 도통 감이 오질 않는다. '지붕 위로 올라가는건가?' '루팡처럼 이 집 저 집 지붕 위에서 막 뛰어다니는걸까?' 대충 설명을 들어서는 뭔지 하나도 감이 오지 않는다. 결국에는 해봐야 알겠다싶어 낮동안 계속 궁금한 걸 참다가 드디어 저녁에 만나기로한 약속 장소로 갔다.
약속 시간에 맞춰가니 오늘은 동행도 한 명 더 있다. 키가 크고 왠만해선 나보다 어깨가 더 넓은 러시아 여자답지 않게 키가 155cm는 됐을까하는 엄청 작은 20살 여자애와 함께 나타났다. 한 눈에 봐도 정말 독특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 사람이다. 자기는 못한다고 하지만 영어가 워낙 유창하고 말이 많아서 열심히 들으려 했지만 이야기하는 것에 반도 쫓아가지를 못했다. 셋이 루프탑 투어를 진행하는 담당자를 만나러 지하철역으로 빠르게 걸어가는데까지 가는동안 여자가 헉헉대며 했던 말들이 인상적이다.
"가는 길에 담배피는 남자애들 봤어? 걔네 마리화나 피더라"
"마리화나는 역시 담배랑은 냄새가 달라"
"그래도 집에서 하는 약이 난 제일 좋아"
러시아는 마약류가 동아시아보다는 약하게 받아드려지나? 심지어 이 여자는 술도 안마시고 오직 마리화나나 다른 약만 한다고 한다. 와! 내가 살면서 마약하는 사람과 함께 길을 걷다니. 중학교 때 엇나간 친구들이 본드랑 가스하는건 들었어도 실제 마약류를 건들이는 사람은 처음 본다. 게다가 그걸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다니. 이 여자를 만나서 러시아 사람이 웃는 것 다음으로 엄청난 문화충격을 받았다. '나 괜히 같이 있다가 같이 잡혀 들어가는건 아니겠지?', '얘 지명수배자는 아니겠지?' 이런 쓸데없는 걱정과 한숨나오는 상상을 하며 지하철 역에 도착했다.
이름도 까먹어서 뭐라 부를지 잊은 여대생님,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내 생각인데 너 키가 작은게 그거랑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아. 히히
치직뿌직 동상. 정확한 발음인지 모르겠다. 어찌됐든 저 곳에 동전을 올리면 행운을 준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치직뿌직은 민요인데 들어보면 그게 뭐냐는 표정이 절로 나오는 민요다.
치직뿌직 - 발음이 이상하게 들려도 실제 이 새 동상을 이렇게 부른다. 내용은 링크를 눌러 확인해 보시길.
정신없는 대화를 하며 정신없이 걸은 뒤, 지하철역에 멈췄다. 아, 그냥 다음부터는 지하철 타자고 해야지 뛰는 것도 아니고 걷는 것도 아닌 경보로 20분을 지나왔네. 여기서 같이 투어 할 그룹과 이 투어를 진행하는 진행자를 만나야 한다는데 15분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걸어왔는데 아무도 없다! 그나마 낙천적인 세 명 (난 아니지만 상황상 그래야만 했다)은 '우리 미리 돈 안내서 다행이다'하며 나름 최선의 방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되짚어 생각해보니 정말 러시아에 온 뒤에 인도나 파키스탄처럼 여유롭고 느긋하게 기다리거나 시간을 때우는 경우를 보지 못한 것 같다. 대도시 위주로 다녀서 그런지 몰라도 표정없이 엄청난 속도로 지나가는 인파들만 봤다. 여기와서 대개 기다리라고 하는 사람들은 공무원이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기에 계속 뭐라고 흥분하는 모습은 자주 보여줬다. (경찰 제외) 이런 경험에 비추어보면 지금의 이 기다림이 확실히 정상은 아니다.
15분이 더 지나고 나서 올렉의 핸드폰이 울린다. 그리고 저 멀리 한 무리의 그룹이 오는데 한 명 빼고는 전부 여자다. 지붕 위를 올라가는 투어라서 난 상당히 격한, 생사를 무릎쓰고하는 액티비티라고 생각했는데 전부 여자로 구성되어진 것이다. 이 투어에 살짝 실망하는 느낌이 가슴에 전해지기 시작한다.
다같이 모인 뒤 10분을 더 걸었던 것 같다. 가는 길에 상당히 패셔너블하면서 담배를 좋아하는 남자와 여자로 구성된 투어 가이드들은 이 투어가 스페인같이 서부 유럽에서 유행하고 있으며 현재 불법인데 정확히 불법이 아니라 관련 법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라서 걸려도 괜찮다라고 동양에서 온 어리버리 남자를 불법이지만 불법이 아니라는 설명으로 안심시키느라 고생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건 올렉과 유창하게 영어를 하는 시험보느라 밤새서 정신없는 라이트 약쟁이 친구가 있어서 설명에 대한 이해도는 완벽했다. 이게 중요한게 아닌가...
드디어 어떤 아파트 내지는 큰 연립빌라 같은 건물에 도착했다. 도착과 동시에 말수가 줄어들더니 도둑놈들마냥 조용조용하게 건물 꼭대기로 올라간다. 5층 아파트 정도의 건물이었는데 시끄러우면 신고가 들어온다고 이동할 때는 조용히 해달라고 한다. 아니 아까 나한테 불법적인게 아니라서 경찰을 만나도 괜찮다고 했잖소...
그리고 곧 지저분한 지붕 바로 아래 부분까지 지나고 나니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보였다.
진짜 그냥 아무런 케이블도 없이 지붕을 밟고 다닌다.
이렇게 지붕 위에 올라가서 그 도시를 구경하는 것이 바로 루프탑 투어다. 보험도 뭐도 없는, 다치면 나만 손해인 투어이지만 여기서 보는 낮은 건물로 이루어진 도시는 이루 말 할 수 없이 아름답다.
저 멀리 우리같이 루프탑 투어를 하는 사람들이 더 있다. 확실히 현재 '현지인들을 상대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핫한 투어인 것 같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아파트 옥상에서 서울보는 투어다. 남산처럼 큰 산도 없다보니 이런 투어가 생길 수 있나보다.
러시아의 소녀들은 그 누구보다 고소공포증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난 다리가 떨리더만.
여기서 약 30분을 보냈던 것 같다. 어쩌면 더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 도시로 스며드는 저무는 해였지만 그 외에도 지붕이 전부 철판으로 되었다는 것과 철판 사이는 테이프로 연결됐다는 점 그리고 그 누구도 안전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 정도였다. 600루블의 돈 치고는 성 이삭 성당에서 본 도시보다 좀 더 친근하고 더 제대로 본 것 같다라고 생각하는 찰나, 두번째 건물로 가자고 한다. 아... 이거 트래킹 코스였냐? 이제 그만 좀 걷자.
지붕과 복도 사이에는 다락방처럼 먼지가 자욱한 곳이 있는데 그 곳으로 가는 쪽문이다.
첫번째 장소에서 또 다시 걷기를 20분. 내 기분에 루프탑 투어는 걷는 것에 치중하는 트래킹 프로그램으로 인식되고 있다.
또 걷는다.
두번째 장소는 타임랩스로 촬영했으나 계산 실수로 어마어마하게 짧게 끝난다. 저 멀리 보이는 푸른 건물은 이번에 가보지 못한 '크론슈타트'다.
오늘 한 루프탑 투어는 러시아 사람 아니면 하기 힘들 것 같다. 구글에 쳐봐도 잘 나오지 않고 도대체 어디에서 정보를 얻어가지고 해야하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에는 구글신들이 많으니 나같은 것보다는 훨씬 잘 찾으시리라 믿는다. 만약, 찾는다면 꼭 해봤으면 하는 액티비티다. 건물 위에 올라가서 서울과 달리 지평선이 끝까지 펼쳐지는 도시에서 사색을 하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물론, 꽤나 많이 걷고 밤이 되면 꽤나 춥기 때문에 가방에 물과 긴팔은 필수로 챙기고 안전을 위해 슬리퍼나 하이힐 말고 제대로 된 운동화를 신고 가야한다.
다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니 시간이 11시.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네시간이나 지났다. 그럼에도 이제서야 해가 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점점 이 도시에서 할 것이 없어지고 있는게 아쉬울 정도로 마음이 편하다. 10시, 11시가 되면 숙소에 있는 것이 여행객의 원칙아닌 원칙이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 특히 네브스키 대로라면 걸어도 괜찮다. 내일 아침을 걱정 안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경비
- 브런치 292R
- 물 55R
- 스키틀즈 29R
- 피의 구원 성당 250R 오디오 100R
- 저녁 블린 219R
- 화장실 30R
- 루프 투어 600R
- 맥주 85R
총 경비 1660RUB
여행 총 경비 525,936원 + 42,253RUB + $15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