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 동안 소나기가 내리는데도 우두커니 공원에서 멍 때리다보니 이제 곧 해가 질 시간이다.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지만 9시나 10시쯤되어야 해가 떨어지니 지금은 8시와 9시 정도인 것 같다. 네바강을 따라 걷다보면 정말 많은 유람선들이 지나다녀 꼭 한 번 타고 싶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 덕에 나의 '추가 여행 항목'에 1순위로 추가되었다.
보트 트립을 하라는 호객이 워낙에 길에 많기 때문에 굳이 찾아볼 필요도 없었다. 다만 러시아 애들이 이야기 해주기를 해가 떨어져서 타는 나이트 보트를 꼭 타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궁전 다리의 도개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리 올라가는게 그렇게 멋지냐고 물어보니 그것뿐만 아니라 네바강은 해가 떨어진 뒤가 더 예쁘다고 말해준다. 이렇게까지 추천을 하니 안탈 수가 없다.
매표소에 도착하자마자 나이트 트립을 외치니 900루블을 달라고 한다. 한국 돈으로 거의 2만원 돈인데 이거면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하루 생활비를 훌쩍 뛰어넘는 엄청난 거금이다. 그래도 별 고민없이 지를 수 있었던 것은 만났던 러시안들의 강력한 추천 덕분이랄까. 티켓을 사니 2시간 뒤에 오라고 한다. 지금이 9시인데 정말 해가 완전히 떨어진 나이트에만 다니는 보트답게 무려 11시에 손님더러 오라고 하는 대단한 투어다. 일단 배가 고프니 남은 100루블로 라면 두 개 사가서 대망의 나이트 보트를 쩝쩝거리며 기다렸다.
11시
기껏 시간 맞춰 도착했는데 나 혼자다. '혹시 나 혼자 타는건가'하는 헛된 희망을 잠시 가졌지만 15분 정도 지나니 각 나라에서 온 관광객 무리들이 하나 둘 씩 몰려든다. 정확히 몰려드는 정도가 아니라 보트가 만석이 되어 바로 출발해도 될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왔다. 이 야심한 밤에 이렇게 인기 있는 아이템이 있는지 처음 알았다.
한 명, 두 명 타는데 러시아 사람들이 들고 있는 표가 나랑 조금 다른 것 같다. 티켓은 똑같은데 가격이 600루블이라고 쓰여 있는 것 같다. '엥?! 나는 900루블에 샀는데 설마 바가지?' 확실히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바가지를 쓴 것 같다. 아니 이거 조금 더 받아서 얼마나 남긴다고 외국인한테는 바가지를 씌우냐하며 출발부터 기분이 확 가라앉아버렸다. 나중에 또 언급하겠지만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관광객들에게 돈을 좀 더 받는다. 박물관, 미술관 어디를 가든 러시아 사람들은 할인 혜택을 받고 관광객은 돈을 그대로 낸다. (조금 비꼬아서 말하면 관광객은 돈을 더 얹어서 표를 산다)
출발!
시작을 알리는 시원한 뱃고동 소리는 없지만 그에 못지않는 엔진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떨리는 나이트 투어가 시작됐다. 시작하자마자 눈 앞에 보이는 불 밝힌 도시는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낮과 밤이 이렇게나 다른 곳인지 낮에는 정말 상상조차 못했다.
평범했던 다리도 지금은 특별하게 다가온다
여름정원을 지나고 있다
관광객을 위해 일부러 세웠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가로등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 건물들을 아름답게 해주고 있다.
시청이었나... 박물관이었나.. 기억은 정확하지 않지만 국가 소유의 건물이다. 이 길에서 가장 환한 조명을 받으며 서 있다
동상이 인상적인 아니치코프 다리를 지나쳐 간다. 이렇게 다리를 하나하나 지날 때마다 그간 걸었던 다리들과 건물들이 기억난다
여기까지가 네바강에 진입하기 위한 맛보기 단계다. 맛보기만 봤는데도 벌써 입가에 미소가 가득할 정도로 만족스럽다. 하지만 진짜는 지금부터. 갑자기 확 트인 네바강이 나오면서 답답했던 가슴도 시원해지고 볼 거리도 많아졌다. 여름이어도 추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싸늘한 밤에 다들 담요를 덮고 덜덜 떨었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것을 다들 직감적으로 느끼고 사진기를 들고 일어난다. 몇몇은 흥분해서 이리저리 부산하게 움직인다. 근데 왜 내 옆에 중국 여자들은 자고 있을까... 이봐요! 일어나요!!
롹앤롤!! 다들 사진기 들고 푸쳐핸섭!
하늘에서 뭔가 내려올 것 같은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다. 이 동네의 신 스틸러는 바로 저 건물이다.
페트로파블롭스키에 가지 않아 이 배가 뭔지 모르겠지만 강에서 봤을 때 정말 멋지다
네바강에 도착한 뒤 속도를 올린 우리 보트는 겨울궁전, 페트로파블롭스키 등 네바강 주변에 있는 유명한 관광지를 한 바퀴 쓱 돌아본다. 유람선답게 사진을 찍어야하는 곳이 있으면 속도를 조금 줄이고 다시 가속을 해준다. 다만, 넓은 네바강에 와서 속도를 높이기 시작하니 정말정말 춥다. 이 투어를 하려는 분들은 꼭 긴팔에 점퍼가 있다면 점퍼를 입고 최대한 많이 껴 입고 나가라고 조언하고 싶다. 그나저나 옆에 중국 여자들은 얼어 죽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 이제 좀 일어나세요...
이제 하이라이트인 궁전다리 도개식을 보러 온 동네에서 온 보트들이 한 곳으로 다 모이기 시작한다.
한 시간 정도 추위와 싸우면서도 아름다운 네바강을 둘어보았다. 이제 하이라이트. 궁전다리 도개식을 보기 위해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배들이 다리 앞에 진을 치고 있다. 어떤 배는 와인을 마시면서 기다리고 (추워서 정말 그 와인 한 모금이 간절했다) 어떤 배는 남자 혼자서 전세를 내고는 담배를 피면서 기다린다. 심지어 관광용 배가 아니라 정말 필요에 의해 도개했을 때 지나가야하는 큰 상선들도 다함께 기다린다. 여러 인종, 타입, 사람수가 다 다르지만 모두가 기다리는 것은 딱 하나, 도개식이다.
열린다!
이렇게 천천히 열린다. 사실 보다가 속 터짐
열리라고 만든 다리 열리는게 뭐 그리 대단하냐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나도 사실 가기 전에는 이게 뭐 대단한건지 몰랐다) 개도식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배 안에 있는, 옆에서 잠만 계속 자던 중국 여자들 포함해서, 모두가 이 광경을 보면서 한 마디씩 내뱉고 사진을 찍고 소리를 지르다보니 점점 다들 개도식에 빠져들면서 탄성을 지르게 된다. 살다보면 감동을 느끼라고 만든 것들에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는 많은 사람들, 나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보면 얼어붙은 것 같은 내 마음 속에서도 감동을 받고 박수가 나오는 것 같다. 그래서 이 당연히 열려야 할 다리가 열리는 것만큼 다같이 보면서 박수를 치는 이 보트가 너무나 좋다. (물론, 너무 천천히 올라가서 한 10초 뒤엔 다들 바로 진정된다)
이번엔 한 쪽만 열린다. 심지어 열린 곳으로 엄청 큰 상선같은 배가 지나간다.
바람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추울지 예상이 된다. '내일 감기구나'라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는다
처음 출발할 때 한 시간 반정도의 거리라고 설명을 들었지만 거의 세 시간 가까이 배를 탄다. 선실 안에서 입벌리고 자다가 정신을 차리니 다들 내릴 준비를 한다. 아름답고 뷰가 환상적인 유람선이지만 정말 피곤하다. 아무것도 안하고 바람만 맞았는데 입술이 다 텄다.
정신을 차리고 주섬주섬 배에서 내렸는데 이게 왠걸...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 아니 도착한 곳이랑 출발한 곳이랑 다른게 말이되냐! 게다가 새벽 2시라서 길에는 사람은 커녕 그 많던 개랑 고양이도 없고 어디서 주정뱅이가 소리치는 소리만 울려퍼진다. 다급하게 핸드폰으로 지도를 보니 1키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 숙소다. 내가 최근에 가장 빠른 속도로 1km를 내달린 것 같다. 숙소에 헉헉거리며 도착하고나니 정말 이게 뭔 일인가 싶다.
처음부터 거의 끝까지 찍은 영상. 8배속으로 돌려도 16분이나 된다. 세워놓고 찍으면 멋있게 나올 줄 알았는데 그리 쉽게 안된다.
나이트 보트 팁
- 정말 바람과 추위가 상상 밖을 벗어나기 때문에 반드시 여분의 옷을 챙겨가야 한다.
- 도착지가 출발지와 다를 수 있으니 그룹지어 가던가 운동화를 신고 뛸 수 있게 하고 나가는 것을 추천한다. 그리고 반드시 GPS가 되는 핸드폰을 챙겨서 숙소까지 안전하게 올 수 있도록 하자.
- 굉장히 늦게 끝난다. 신변의 안전이 위험할 일이 없도록 귀중품은 모두 두고 사람 여럿 모아서 다니자.
- 출발 시간보다 조금 일찍 가서 기다리는 것을 추천한다. 자리가 좋아야 사진찍기 좋다.
- 2016년에 갔을 때 900루블인데 아마 매년 가격은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경비
- 점심 266R
- 물 음료 152R
- 27일까지 방 값 600R
- 저녁 라면 도시락 두 개 80R
- 나이트 보트 900R 덤탱이 맞은가 같다
총 경비 1998RUB
여행 총 경비 525,936원 + 44,251RUB + $15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