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버스를 타고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야하기 때문에 모든 짐을 들고 나왔다. 어젯밤 자려고 마음을 편히하는데 독일 아니면 네덜란드로 보이는 이제 갓 대학생이 된 것같은 커플 둘이 쉴새없이 떠들고 겨땀냄새로 공격을 해대는 통에 잠을 제대로 자지도 못했다. 찌뿌둥하고 짜증이 한 가득한 몸과 마음으로 밖으로 나왔는데 탈린의 날씨는 내 기분과는 상관없이 정말 맑고 화창하다.
엄마와 여자친구에게 선물을 하나씩 하려고 기념품점에 들어갔다. 혼잡하지도 않고 차분한 분위기의 작은 기념품 가게였는데 이 지역의 아기자기한 건물들을 본따서 만든 풍경이 눈에 확 띄었다. 바람 불면 은은하게 울리는 풍경을 원래 좋아하기도 한데다 이 지역 사람들이 직접 손으로 빚어서 만들었다고해서 조금 더 의미가 있어보였다. (물론, 손수 만든 덕에 조잡하다)
두 개를 사고나서 유유히 30분정도를 걸어다녔을까?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불안한 기운을 느끼는 것은 거의 동물에 가까운터라 짐을 풀러서 지금 나한테 가장 소중한 것들을 재빠르게 기억해내며 확인해봤는데 아뿔싸!! 여권이 없다!!
워낙에 성격이 덜렁덜렁 그자체이지만 그래도 그렇지 여권을 잃어버리다니. 얼른 뛰어가서 게스트하우스부터 뒤져봤다. 애가 타고 이제 보기만 해도 짜증나는 호스텔을 아무리 뒤져도 좀처럼 여권이 나오지를 않는다. 거울은 안봤지만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는 것 쯤은 직감할 수 있었다. 그 면상을 들고 그 다음으로 방문한 기념품점으로 뛰어 들어갔더니 들어가자마자 직원이 웃는 얼굴로 '너 뭐 잃어버렸지?' 라면서 씨익 웃으면서 놀린다. 아... 다행이다. 여기에 두고 왔구나 하는 안도감에 다리가 풀리면서 그제서야 좀 웃을 수 있었다.
근무 교대 시간인데 다음 사람에게 생김새를 설명할 수가 없어서 조금 기다려봤다는 직원에게 정말 연신 고맙다고 한 뒤 거리로 나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부끄러워 도망치듯 나왔다. 이렇게 친절하고 유머러스한 사람이 있는 곳에서 난 그저 걸어만 다니고 있는 것 같다. 여기와서 내 기분을 상하게 한 것들은 생각해보면 전부 에스토니아 이외의 것들이다. 게스트하우스, 그 안의 사람들, 식당 등등.. 전부 다 에스토니아 사람들때문에 벌어진 일들이 아니었는데 너무 간단히 일반화를 시켜 이 도시 전체에 우울한 기분을 내가 씌운 것 같다.
정말 고마운 환전소겸 기념품점. 이 글을 볼 일이 전혀 없겠지만 정말 감사합니다.
잔디밭에 짐을 전부 팽개치고 벌러덩 누워서 생각해보니 하루 이틀 이런게 아니다.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혼자 그 범위를 무한히 넓혀 일반화 시킨 뒤 배척하는 일이 너무도 자주 있다. 언제쯤이면 객관적이고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사물과 사람들을 판단할 수 있을까? 잔디밭에 한숨 푹~ 쉬면서 누워있으니 그나마 좀 편해지는 것 같다.
경비
- 브런치 1.39E
- 기념품 4E
- 콜라 1.10E
총 경비 €6.49
여행 총 경비 525,936원 + 47,499RUB + $312.26 + €9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