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가족 여행이란 타이틀로 시작한 여행인데 시작 처음부터 극기 훈련이다. 엄마는 모르는 아줌마한테 초코바 얻어먹고 누나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한라산은 여행에서 뺄 걸 그랬나하고 머리가 복잡하게 계산하는 찰나에도 위장은 먹을게 없으니 내놓으라고 소리를 지른다. 배가 고파서 초코바를 꺼내 먹으려고 하니 대피소에 도착한다. 대피소 위치는 분명 대피를 잘하기위한 곳보다는 먹을게 가장 잘 팔릴 곳에 설치한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딱 배고플 때 나타날리가 있겠는가!
분위기가 어디 가까운 갈 수 없는 나라의 배급소 같지만 엄연히 대피소다
윗세오름
야생을 포기한 까마귀들이 음식을 노린다. 알아서 터득한건지 몰라도 사람이 먹을 때 주위에 얼씬도 하지 않는다.
진짜 새까만 까마귀. 신기하게도 사람들이 다 먹을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린다.
대피소에 도착하니 대피소보다는 급식소라고 이름을 바꿔야 할 것 같다. 그래도 관광지여서 그런지 분위기가 공산주의 시절의 동유럽 배식소보다는 서유럽의 자유가 넘치는 광장에 온 것처럼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라면과 수다를 곁들이고 있다. 꽤나 넓은 공간이어서 세 명 앉아 밥 먹을 자리는 쉽게 찾았다. 일단 주린 배부터 채우려고 매점에 가니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이 풍경은 20년 전 뉴스에서보던 망해가는 소련의 현실이라며 보여준 배식줄이다. 심지어 배식을 하는 사람들 아니 음식을 파는 사람들의 표정에 소련 다큐에 나왔던 절대 더 줄 것 같지 않은 얼굴들이 오버랩된다.
이런 부정적인 말들을 긍정으로 바꾸는데 필요한건 라면이다. 라면의 마법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모든 부정한 기운을 싹 잡아간다. 얼마나 라면의 힘이 큰지 앉아 있는 사람의 표정을 보면 '아, 저 사람 라면 한그릇 맛있게 잡수셨구만'하고 바로 알 수 있다. 오뚜기 라면이 이렇게 맛있었던가. 생전 처음 라면 먹는 사람들처럼 먹고나니 국물 버리는 곳을 알 필요가 없었다.
역시 최고의 조미료는 '굶주림'이다.
호텔 셰프의 코스요리 부럽지 않은 윗세오름 매점 코스 정식.
대피소 주위의 산들이 저렇게 예쁜 흰색 옷을 입었는지 사진으로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