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이브여서 가족 모임으로 성수역 근처를 갔다. 다들 알겠지만 크리스마스 이브는 30분을 돌아다녀도 예약을 하지 않은 자에게는 자리 따위 내주지 않는 초절정의 성수기이다. 그렇게 돌고 돌다가 골목에 있는 작은 와인바 앞에 있는 메뉴판을 봤다. 와인만 파나.. 하며 조심스레 쳐다봤는데 스테이크다! 스테이크를 판다!! 살짝 문을 열어봤을 때 자리가 넉넉해보였다. 하지만 그래도 긴장의 끈을 놓칠 수는 없었다. 이전에 들렸던 모든 가게들의 자리는 절반만 차 있었지만 우린 그 어디에서도 엉덩이를 주차하고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살짝 걱정스럽게) "혹시 자리 있나요?"
"바에 앉으셔도 괜찮으신가요?"
'안될게 뭐 있겠습니까. 스테이크만 주셔도 아이쿠 감사합니다.'라고 생각하며 도착한 곳이 "르 파르"이다. 왜 르파르라고 붙여 썼는지는 모르겠다
찾아보니 한국어로는 "등대"란 뜻의 가게는 제대로 발음하면 "르 파~"로 발음된다. 뭐 이런게 먹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으니 바로 메뉴와 나온 음식 사진들을 올린다.
최고의 성수기인 것을 감안한다면 정상적인(?) 가격이다.
뒤로도 두어장 더 있는 와인리스트지만 귀찮아서 그냥 가격 비교할 겸 앞 장만 찍었다. 뭐가 좋은 와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유일하게 아는 뵈브 클리코가 14만원이다. 이건 코스트코의 두배 정도의 가격이다. 빈티지에 따라 가격이 다르겠지만 내가 몇군데 안가본 레스토랑 중에선 저렴한 편에 속한다.
우리를 빼면 전부 예약석이고 커플석이다.
이건 필터없이 찍은 사진인데 내 눈에는 위에 필터를 넣은 사진이 이 가게에서 본 색감과 비슷하다. 조명이 할로겐램프라서 따뜻한 느낌이 돈다.
드디어 고기!
필터 썼는데 좀 이상하죠?
너무 배고파서 먹다가 와인 받다가 사진찍다가 난리도 아니었다. 그 와중에 와인은 삐뚤하게 찍었다. 보정은.. 귀찮..
가족모임이라 엄마와 함께 갔더니 사장님께서 어머니와 관련된 와인이라며 이 와인을 추천해주셨다. 집에와서 찾아보니 와인 제작자의 엄마인 "Merce"를 기념하기 위해 이름이 붙여졌다. 사장님의 센스에 박수를.
스테이크를 먹었지만 술도 남고 약간 부족한 감이 있어서 굴을 더 주문했다. 오늘 통영에 특별히 주문했다고 하시는데 오~ 정말 비린내도 없고 매우 신선했다. 게다가 레몬을 짜도짜도 계속 남도록 충분하게 주셔서 매우 풍족하게 먹었다.
"무슨 필터가 좋을지 몰라 다 준비해봤어" 버전 굴의 신선함을 보여주려면 밝게 찍었어야 했는데 먹는게 최우선이다. 한 손엔 포크 한 손엔 카메라.
요즘 레스토랑이야 워낙 요리들을 다 잘하고 내가 이것저것 따져가며 먹을 정도로 스탠다드가 높은 혓바닥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정도 퀄리티의 음식이라면 내겐 최고급이다. 특히 굴은 조금만 비린내가 나도 안좋아하는데 오늘 먹은 굴은 정말 맛있게 먹었다. 거기다 가격이 아깝지 않게 양을 넉넉하게 주셨다.
음식들도 좋았지만 서비스가 정말 좋았다. 우리를 바에 앉힌게 미안하셨는지 주문에서부터 화장실 안내와 물도 정성스럽게 해주셨다. "사장님덕분에 아주 좋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는 매우 상투적이지만 오늘 느낀 느낌을 그대로 전달하는 말이다. 특히, 오늘같은 날, 엄마와 관련된 와인을 추천해 주신 것은 정말 최고였다. 내가 와인을 마시러 다니면서 여러 추천을 받아봤지만 이렇게 완벽한 이유를 대면서 추천해 준 것은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주로 연인과 가겠지만 가족들끼리 조용히 저녁을 보내기에 좋은 장소같다. 공간이 아주 넓지 않고 조명의 배치를 앞 사람에게 집중 할 수 있게 되어 있어서 가족파티처럼 작은 모임에 잘 어울리는 공간같다. 물론, 회식으로도 매우 좋은 장소이지만 뱅뱅사거리조차 멀다고 반대하는 우리 회사 사람들이 이 먼 곳까지 와서 와인을 마실 것이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
돌아가신 피터의 엄마 Merce를 기리기 위한 와인. 어버이날이나 부모님 생신때 드리면 좋을 것 같은 와인이다.